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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마라토너, 또 한 번의 레이스 - 이봉주 前마라톤 선수, 스포츠해설위원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7-07-07 15:09
  • 분류지식을 나누다
  • 조회수2495

국민 이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는 것은 , 그 어감처럼 가볍지 않다 . 많이 알려졌다고 해서 , 인기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 이봉주는 국민마라토너다 . 국민들이 마라토너 하면 떠올리는 이름 , 국민 누구나 알아 보는 얼굴의 주인공이다 . 은퇴한지 8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 메달이나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 식상한 단어이지만 , 우리가 그를 높이 사는 이유는 성실함이다 . 미련할 정도로 마라톤밖에 몰랐고 참고 견디는 걸 제일 잘 했다 . 레이스를 떠난 지금도 , 여전히 마라톤이 인생의중심이다 .  

이봉주 선수의 2001 보스톤 마라톤 대회 우승 장면

여전히 마라토너  

운동복 차림도 괜찮을까요 ?” 화성의 한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날 오전 , 이봉주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 곧바로 그럼요 라고 답장을 보내고 나서 , 가만 생각해보니 이봉주 하면 운동복 입은 모습밖에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 은퇴한지가 벌써 8 년이지만 이봉주는 여전히 마라토너로 기억된다 . 방송을 통해 많이 봐온 때문인지 , 첫 대면인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 “TV 에서 보는 것보다 피부가 더 까마신 것 같아요 .” 스스럼없이 말해놓고는 너무 예의가 없었나 싶어 뜨끔했다 . “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 운동해서가 아니라 원 래 까만 편이에요 .” 이봉주는 히죽 웃으며 말을 받았다 . 각종 마라톤 관련 행사 참석에 예능방송 출연까지 , 현역 선수일 때보다 훨씬 더 바쁘게 지낸다는 그 .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매일 새벽에 기상해 운동하는 것만큼은 어기는 법이 없다 . “ 저만의 관리방법이자 규칙이었어요 . 무조건 5 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해왔어요 . 잠도 매일 같은 시간에 자고요 . 몸을 단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헤이해지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어요 .” 흔히 마라톤을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이라고 표현한다 . 대회 3~4 개월 전부터 식이요법을 하며 하루에 30 km 씩 달리는 지옥훈련을 해야한다 . 이봉주는 그 처절한 싸움을 41 번이나 이겨냈다 . 근거 없는 (?) 자신감 , 그리고 노력 어렸을 때 꿈은 축구선수였다 . 가정형편 때문에 그저 꿈만 꿨다 . 그러다 고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친구 따라 들어간 육상반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 “ 특활반을 정할 때 딱히 할 것도 마땅치 않고 해서 육상반에 들어갔어요 . 1 년 정도 했더니 실력이 많이 늘더라고요 .”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축구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에게 반바지 하나면 되는 육상은 새로운 꿈으로 다가왔다 . 인천체대 합숙 훈련에 합류하게 된 그는 평소처럼 무던하게 훈련에 임했고 그를 눈 여겨 본 삽교고 선배의 제안으로 삽교고로 학교를 옮겼다 . 등록금 면제에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기에 1 학년으로 재입학해야 함에도 결단을 내렸다 . 그리곤 대회마다 입상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 학교 사정상 육상부가 없어지면서 광천고로 또 다시 전학을 간 그는 계속해서 기량을 높여나갔다 . “ 아무래도 늦게시작했으니까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죠 . 일찍 시작한 친구들은 기본기가 잘 돼있죠 . 기술이나 체력적인 면에서요 . 생각해보면 전 마라톤 선수로서의 조건이 맞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 기본적으로 스피드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타고나는 거거든요 . 그래도 전 늘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 작은 키에 마른 체격 , 게다가 평발과짝발인 분리한 신체조건 . 참을성과 근성이 아니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 그리고 그 원천은 긍정적인 자세였다 . 조금만 더하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그를 버텨내게 했다 . 감사하게도 늘 운이 따랐다 . “ 대학이든 실업팀이든 계속 운동을 하려면 고 3 때 대회성적이 좋아야 해요 . 1, 2 학년 때는 뚜렷하게 성적을 못 냈는데 고 3 때 전국체전에서 3 등을 했어요 . 그 덕분에 특기자로 서울시청에 들어갈 수 있었고요 . 실업팀이니까 월급도 받으면서 서울시립대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좋은 조건이었지요."

주황색 상의의 이봉주 선수

집념으로 쓴 기록

1990 년 서울시청에 입단한 그는 그 해 전국체전에 출전해 2 시간 19 15 초로 2 위를 차지했고 , 1993 년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대 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 1993 년 코오롱으로 적을 옮긴 그는 2 년 뒤인 1996 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 3 초 차로 놓친 금메달이었지만 아쉬움도 후회도 없었다 . “ 올림픽 역사상 1, 2, 3 등이 그렇게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건 처음이었어요 .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내려주는 거라고 하잖아요 . 감사한 마음이 더 컸죠 .” 1999 년 후배 김이용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반발해 코오롱을 탈퇴한 그는 2000 년 도쿄 마라톤대회에서 2 시간 07 20 초의 한국 신기록으로 2 위를 차지했다 . 무소속으로 여관방에서 생활하며 제대로 훈련도 하지 못했기에 감격은 더욱 컸다 . 2000 년 삼성전자에 입단하며 무소속을 마감한 이봉주는 2001 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과 2002 년 부산 아시안게임 우승 , 2007 년 서울 국제마라톤 우승 등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 “ 아무래도 보스턴 마라톤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 세계 3 대 메이저 대회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는데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 대회 직전 ,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 상을 치르자마자 경기를 뛰었기에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 . 그는 큰 상실감과 슬픔을 안은 채 그냥 계속 스스로 주문을 걸며 뛰었다 . 1 위로 결승테이프를 끊는 순간 뜨거 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그곳에 있던 교민들도 함께 울었다 . 은퇴 그리고 또 다른 레이스 그는 마흔이던 2009 년 전국체전 마라톤 우승을 끝으로 선수생활 을 마쳤다 . 44 번 대회에 출전해 41 번 완주했다 . 세계의 어떤 마라톤 선수도 생애 41 번의 풀코스를 뛰지 못했다 . “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 많이 아쉽긴 했죠 . 20 년 넘게 선수생활을 해왔는데 하루아침에 내려놓는다고 생각하니까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 그런 아쉬움이 이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 돌아보면 고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 매번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그의모습에 국민들은 감동하고 희망을 얻었다 .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봉주를 국민마라토너 라 불렀다 . 수많은 메달과도 바꿀 수 없는 상이었다 .  

물병  

  은퇴 후 가장 큰 변화는 훨씬 더 바빠졌다는 것이다 . “ 선수생활 할 땐 바운더리가 좁잖아요 . 그저 운동만 하니까요 . 그런데 은퇴 후에 는 활동을 다양하게 하다보니까 더 바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 그는 마라톤을 알리고 마라톤 활성화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발 벗 고 나선다 . 방송 출연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언젠 가는 재단을 설립해서 후배 선수들을 육성하고 후원하고 싶다 . 손기정 선수는 운동선수이기 전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상징하잖 아요 .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운동이죠 . 마라톤의 정신과 가치를 알리는 게 또 하 나의 제 역할 같아요 .” 후계자를 만들어 놓지 못하고 은퇴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 마라톤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왔기에 , 이제 는 마라톤을 위해 살아갈 생각이다 . 은퇴 후 시작된 인생의 두 번 째 레이스에서도 이봉주는 기꺼이 열심히 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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