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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과 안평, 대권을 두고 피를 부르다.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7-07-07 15:03
  • 분류지식을 나누다
  • 조회수2948

세종대왕은 정비 소헌왕후 심씨로부터 8 명의 아들을 낳았다 . 8 명은 다른 다섯 명의 부인이 낳은 10 명의 왕자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보였다 . 장자는 후에 훈민정음 창제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문종이 되었지만 몸이 허약한 데다 단종 하나만을 후손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실의 한을 남겼다 . 그리고 차남 수양 , 삼남 안평은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 나머지 다섯 형제도 이 둘을 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생사의 갈림길에 휘몰리게 되었다 . 같은 핏줄이면서 이 두 형제는 왜 역사의 맞수가 되었을까 ? 세종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적장승계를 깨뜨린 이 골육상쟁은 무엇 때문에 비롯된 것이며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

너무도 잘난 두 아들의 치열한 경쟁심

수양은 욕심도 많았고 명예욕과 자부심 , 정치적 판단력과 결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 세종은 그런 수양이 미덥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 게다가 적장자도 아니라 보위를 물려 줄 생각은 하지도 못한 것이다 . 그러면서도 문종 이후 수양의 정치적 행보가 염려가 되었던지 몇 번이나 왕직에 대한 충성심을 가르치고 맹세시키곤 했다 . 이에 반해 안평에 대해서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세종이 큰 사랑을 베풀었다 . 그가 보여준 재능은 당대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선비들의 부러움을 샀다 . 그는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이었으며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고 오로지 예술적인 인맥을 넓혀갔 . 자연히 따르는 자가 많았고 정치가들도 안평과 줄을 이으려는 인물들이 늘어났다 . 안평을 예술가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 1438 ( 세종 20) 3 , 세종은 새로 확보한 사진 ( 四鎭 ) 의 안정을 위해 경재소를 설치했는데 , 그 업무를 종친에게 맡겼고 이 때 안평도 회령 ( 會寧 ) 을 맡아 실력을 뽐냈다 . 문필과 관련된 일도 맡았는데 문종과 함께 훌륭하게 처리해 평가를 좋게 받았다 . 정치적으로도 재능이 있었다는 얘기다 . 두 사람의 인기는 안평 쪽이 훨씬 높았고 인맥도 더 든든했다 . 양으로서는 자신의 지위가 안평으로 인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을 만했다 .  

몽유도원도

< 몽유도원도 >, 살생부가 시작되다

세종 29 년이던 1447 4 월 어느 날 새벽 . 막 잠에서 깨어난 , 당대 최고의 화백 안견은 안평대군이 보낸 노복으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 안견이 도착한 곳은 안평대군의 사저였다 . 그는 거기서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이상향을 듣고 평생에 남을 걸작을 그려주었다 . 바로 < 몽유도원도 > 이다 . 지금 < 몽유도원도 > 는 일본 덴리 ( 天理 ) 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 최고의 걸작이자 대표적 국보급 문화유산인데 우리나라에 없다는 점도 비극이고 이 그림이 불러온 피비린내나는 사건도 비극이었다 . 그림의 가치는 문학사적 ,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것 말고도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무한한 국보적 가치가 있었다 .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 수를 비롯해 당대 20 여 명의 고사 ( 高士 ) 들이 쓴 20 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 이들 찬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녔다 . 한 편 한 편 마다 모두 예술사적 가치가 풍부한데 무려 20 여 편의 찬문이 모여 있으니 예술사적 백과사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만한 작품이었다 . 내막은 더 깊은 데 있었다 . < 몽유도원도 > 가 그려지고 난 3 년 후 안평의 집에 21 명의 문객이 모였다 . 당대의 내로라하는 원로 유학자와 문인 , 정치가 , 예술인 , 젊은 집현전 학자들이 참석했다 . 조선을 이끌고 갈 모든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엘리트들이었다 . 안평은 이들을 불러 당대 최고의 그림에 찬문을 부탁했다 . 이날 찬문을 써 넣은 사람들은 대제학이던 조선 최고의 악성 박연 , 의정 부 우찬성으로 곧 이어 조선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를 김종서 , 안평의 책사이자 풍수의 대가 이현로 , 대사헌이며 주역의 대가 이적 , 원로 유학자 최수 , 이조판서 정인지 대감 , 그리고 신숙주 ,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이었다 . 그런데 이들은 곧 커다란 정치적 갈림길에 들어서게 된다 . 1452 5 .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11 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대궐에는 어린 왕을 수렴청정 할 왕비나 왕대비가 없어 왕의 유언에 따라 김종서 , 황보인 , 정분과 같은 노대신들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되었다 . 정권은 이들 노대신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 말은 아니라도 섭정 상태였다 . 단종 시대 정치의 내부적 주역은 이들 대신들로 , 이들은 엄격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수양보다는 명망 있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안평과 어울렸다 . 안평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나 말 잘하고 사교성이 좋은 데다 시화에 능숙한 재간둥이 안평대군에 힘이 쏠리고 있었던 것이다 . 안평의 명성에 눌린 수양대군의 신세는 어땠을까 ? 정치적 동지도 거의 없었고 후원자도 별로 없었다 . 그러나 야심은 컸다 . 그는 하나둘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갔다 . 안평과 수양은 형제간이었으나 정치적 대결은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수양은 우선은 불리한 상황이었다 .  

세조 영정

피를 부른 맞수 참모들의 대리전

수양에게 한명회 ( 韓明澮 ) 라는 걸출한 초보 책사가 있었다면 안평대군에게는 이현로 ( 李賢老 ) 라는 탁월한 중견 책사 ( 策士 ) 가 있었다 . 책사간의 경쟁으로만 봐도 안평은 수양에 비해 한 수 위였다 . 이미 이현로는 문과 급제 출신으로 세종 때부터 촉망받는 문신이었다 . 집현전 부교리 , 병조정랑까지 올라가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다 . 그의 학식과 지혜는 정평이 나 있었다 . 게다가 그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자 정치가인 김종서의 비호를 받고있었다 . 호랑이 김종서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 안평은 이현로를 책사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김종서와 손을잡은 모양새가 되었다 . 이에 반해 한명회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문이 깊지 못했 던지 아니면 운이 없었던지 몇 번이나 과거에 떨어졌다 . 그 때문에 관직이라고는 나이가 38 세이던 해인 1452 , 문음을 통해 그나마도 종 9 품의 말단직 , 경복궁 문지기를 맡은 것이 고작이었다 . 보이는 것만 비교하자면 한명회는 이현로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 하지만 수양은 권람의 추천으로 칠삭둥이 한명회를 책사로 잡았다 .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한명회는 모략과 사람을 보는 눈 , 정치적 전술전략에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 고명사은사로 중국에 같이 다녀온 신숙주도 수양대군의 편이 되었다 . 세종이 일찍이 점찍은 집현전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인 셈이었다 . 이제 수양과 한명회는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면서 정적의 명단 확보에 최고의 심혈을 기울였다 . 그는 안평의 진정한 친구와 수양의 세력에 호응할지 모를 안평의 세력을 살피고 있었다 . 그 때 한명회에게 < 몽유도원도 > 의 찬문 사본이 들어갔고 이 찬문 명단이 한명회의 살생부 원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림 속에 들어간 21 명의 친 안평대군 세력 가운데 신숙주 , 정인지 등은 수양의 세력이 되었지만 한명회는 그들을 제외하고 찬문의 명사들 하나하나를 살피며 피아를 가려 축출해야 할 정적을 선택한 것이다 . 이름 하여 살생부였다 . 한명회가 이 살생부의 실질적인 작성자였다 . 당연히 이 일은 안평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견제와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 그리고 단종 1 10 10 일 수양대군의 거사가 누설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 잠시 망설이던 수양대군은 가솔들의 재촉에 힘입어 급히 병사를 일으켰다 . 그리고 문종의 유언을 받은 세 정승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적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 ,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 이 쿠데타 직후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죽였는데 , 사변이 너무 급하게 일어나 아뢸 틈이 없었다 .’ 고 상주했다 . 그는 다시 임금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 대궐에 들어오던 황보인 , 조극관 ,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 이른바 살생부에 실린 인물들이었다 . 이미 좌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켰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 ( 賜死 ) 했던 그였다 . 한명회의 살생부에 오른 이들은 모두 죽거나 유배를 갔고 < 몽유도원도 > 가 그 빌미를 제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 피의 살생은 끝나지 않았다 . 이어서 일어난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거사 실패로 수양은 임금이 된 지 3 년째 되던 해 6 21 일에 단종을 노산군 ( 魯山君 ) 으로 강봉하고 영월 ( 寧越 ) 에 유배했으며 사약을 내렸다 .

죽음으로 갈라진 형제

안평은 그림을 잘 보고 문장과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사람의 속내는 미처 살피지 못했다 . 그는 수양에게서 버림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 문종의 적장자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세종의 6 남 금성대군은 안평대군의 뒤를 따랐다 . 수양대군과 한 방에서 잘 정도로 서로를 아꼈지만 단종을 둘러싸고 갈라졌고 기질이 비슷하여 잦은 마찰 끝에 결국 수양대군의 손으로 ( 세조 등극 후 )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 반대로 4 남 임영대군과 8 남 영응대군은 수양의 편에 섰기에 천수를 누렸다 . 외견상 보이는 것만 훌륭하게 여겼던 안평과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용을 중요시 여긴 수양의 수싸움에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도 부족했던 수양이 한판승을 거두고 말았다 . 사가들은 수양은 정치적 승리에 올인한 반면 안평은 너무 한 눈을 팔아 결국 다 이긴 싸움을 패전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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