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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대 흙수저의 혈전, 김부식대 정지상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7-07-05 17:08
  • 분류지식을 나누다
  • 조회수4240

고려 최대의 학문적 라이벌이자 정치적인 숙적으로 보수주의자 김부식과 진보주의자 묘청을 꼽는 이들이 있다 . 그러나 실은 정지상이야말로 묘청의 싱크탱크이자 서경 천도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김부식의 진정한 맞수라고 할 수 있다 . 또 타고난 부와 권세 , 수구적인 이미지를 가진 전형적 금수저 계급 출신인 김부식과 하층민의 자제로 진보적인 이미지에 흙수저로 태어난 정지상의 계층 간 충돌로도 이 둘은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으며 시 ( ) 를 둘러싸고 벌인 두 사람의 문장 전쟁도 큰 흥밋거리였다 . 피를 부른 전쟁 , 서경파와 개경파의 길고 긴 싸움

  김부식 10759-11-19 )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정치가했다. 이자점과 단청의 난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忠 족제 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
?太們下列史事叫?子正是 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보려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중세의 유교적 합리주의자였다.
정지상 7~1125 =13]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가폰 서정시는 한 시대 시의 수준은 끌어올렸고, 그는 대대로 시인의 모범이 되었다. 다른 한편 그는 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무리들과 어울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적극 나섰다. 그러나 정치적 포부는 좌절 되었고, 우리에게 그는 다만 몇 편의 시로 남아 전해진다.

김부식 (1075~1151) 은 명문가에서 김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라 사서삼경을 공부했고 형제들이 모두 관직에 나가 출세하는 등 명문가의 아들로 이름을 날렸다 . 그의 이름에서 ’( ) 은 중국의 대문재 소식 ( 蘇軾 ) 을 능가하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었으니 부모가 거는 기대도 남달랐다 . 그의 문장력은 해동성자라고 할 정도로 수려했고 상대를 설득하고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는데 남다른 능력을 가졌다 . 소위 금수저 출신이었고 개경 집권세력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 한 마디로 그는 많은 것을 거머쥐고 있었다 .  

이에 반해 정지상 (?~1135) 은 서경 ( 평양 ) 에서 가난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이나 재산이 도무지 내놓을 만 한 것이 없는 흙수저였다 . 그럼에도 글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다섯 살 때 대동강 부벽루에서 열린 시회에 나가 어른들 사이에서 걸출한 시를 남겨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 사람이 흰 붓을 가져 을자 ( 乙字 ) 를 강 물결에 썼는고 .'

어린 정지상이 아름다운 강물 위에 백조 한 마리가 떠 있는 모습을 이처럼 간결하고 빼어나게 쓴 재주로 고려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칠 인물로 커 갈 것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 그는 국자감을 거쳐 예종 9 년인 1114 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승승장구 성장해 나갔다 .

고려 시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을 꼽으라면 정지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지상의 시는 빼어나고 대단했다 . 그가 지은 동강송우 ( 大同江送友 : 대동강에서 벗을 떠나보내며 )’ 는 고려 사회를 놀라게 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은 짙은데 ( 雨歇長提草色多 ) 남포에 임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 送君南浦動悲歌 ) 대동강물이 어느 때 마를 건가 ( 大洞江水何時盡 )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 더하거늘 ( 別淚年年添綠波 )

정지상의 이 멋진 시를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인종과 김부식이었다 . 특히 시를 좋아하던 인종은 그를 아껴 조정에 중용했다 . 자연스럽게 김부식과 정지상은 둘 다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 그때 정지상의 시 한 수가 김부식에 눈에 들어 왔다 .

절간에 염불소리 그치니하늘빛이 유리처럼 깨끗하네

김부식은 정지상의 이 시 뒤쪽에 자기 시를 달아 붙이기를 원해 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 그러나 정지상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고 그 후 몇 차례 더 김부식이 부탁했음에도 아예 들은 척도 않았다는 것이다 .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김부식이 이 일에 대단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 고려사절요에 김부식은 원래 문인으로 정지상과 같이 이름을 날렸는데 문자관계로 인해 불만이 쌓여 ...’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문단 내 대립관계는 개경과 조정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자존심과 자기주장이 아주 강했던 인물들이었다 . 김부식은 인종이 외조부 이자겸을 다른 신하와 달리특별 대우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홀로 나서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이자겸이 스스로 임금의 특혜를 물리도록 할 정도로 정치적입김이 센 인물이었다 . 정지상도 만만치 않았다 .

척준경이 이자겸을 몰아내고 권세를 잡자 새로운 권문세가로 토색질에 나선 것 을 보고는 권세 당당한 척준경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 인종 5 (1127) 좌정언 ( 左正言 ) 으로 있으면서 척준경 ( 拓俊京 ) 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버렸으니 일약 조정의 풍운아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 정치적으로 뛰어나고 시도 잘 쓰는 스타성 강한 인물이 된것이다 . 김부식과 정지상은 이제 경쟁하는 상대가 되면서 서로를 멀리하게 되었다 .

  고서화 고서화

강 대 강 , 서경천도를 둘러싸고 마침내 적이 되다 .

둘의 꼿꼿한 자존심은 조정과 문단에서 내내 화제를 몰고 다녀 두 사람은 드러내 놓고 앙숙의 관계에 서게 됐다 . 관계가 결정적으로 갈라진 것은 서경천도를 둘러싼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이었다 . 처음에는 정지상이 김부식보다 유리했다 . 정지상이 임금의 경연 강의를 도맡아 있었고 묘청 백수한과 함께 서경 천도 운동의 중심으로 나서면서 궐내에서 정지상을 능가할 사람이 없어보였다 .

그러나 김부식은 속으로 그를 견제할 기회만 보고 있었다 . 임금을 서경으로 불러내어 천도를 확정지으려는 서경파와 이를 반대하는 개경파의 물밑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 그러나 천도 준비과정에서 벌어진 예기치 않은 사건들과 개경 고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수 년에 걸친 설득과 반론 , 찬반여론이 맞붙으면서 임금은 결국 서경으로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천도가 좌절되자 묘청은 난을 일으켜서라도 수구적인 개경파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 김부식은 이를 정벌하는 진압군의 원수로 올라섰다 . 그는 진압에 앞서 묘청과 내통하는 무리를 없애야 한다 . 며 왕에게 허락을 받고 정적 정지상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처형했다 . 전승에 따르면 정지상은 죽어서 도깨비가 되었다 . 김부식이 어느 봄 버들 빛 천 갈래 푸르고 복숭아꽃 만 점 붉어있 라고 시를 읊자 공중에서 도깨비로 나타나 뺨을 후려치며 누가 세어보았느냐 ? 버들 빛은 가지마다 푸르고 복숭아꽃 송이마다 붉어있네 라고 왜 읊지 못하느냐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  

영정 그림

삼국사기  

< 연려실기술 > 의 저자 이긍익은 두 사람을 이렇게 평가했다 . “ 김부식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 정지상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다 .” 둘의 관계는 죽어서까지 거론될 정도로 숙명적 라이벌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강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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