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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리바이벌, 다시 보는 올림픽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6-10-10 13:46
  • 분류지식을 나누다
  • 조회수2088

1976년 7월 18일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완벽한’ 나디아 코마네치의 이단평행봉 연기가 끝나고 스코어보드에 불이 들어왔다. ‘1.00’. 웅성대기 시작한 관중을 뒤로하고 벨라 카롤리 코치는 심판을 향해 거세게 항의했다. 그때 스웨덴 심판이 열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만점이라는 뜻이다. 신이 아니고서야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스코어보드 역시 9.99까지만 표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던 것. 153 cm, 몸무게 40 kg의 체조요정은 세계로부터 ‘탄력이 충만한 바비 인형’, ‘인간의 몸을 빌려 나타난 체조 요정’이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최고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을 넘어서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는 의미였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역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한 올림픽
1976년 7월 개최된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은 역대 올림픽대회 사상 가장 엄중한 경비 속에 펼쳐졌다. 이전 뮌헨 올림픽 대회의‘검은 9월단 사건(팔레스타인 테러 단체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올림픽 선수촌에 잠입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습격한 사건)’의 영향으로 보안과 경비가 대폭 강화된 것이다. 이 때문에 개최비용이 예상의 몇 배가 됐고, 결국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한 올림픽이 됐다. 캐나다 몬트리올 시는 경비조달 문제로 대회 개막일까지 주경기장 완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대회는 열렸지만, 이후 몬트리올의 재정이 악화되어 시민들의 고통이 잇따랐다. 올림픽 개막식 절정의 순간인 올림픽 성화는 최초로 전자식으로 전달됐다. 아테네의 실제 불꽃이 전자 펄스를 이용해 오타와에 채화됐고, 이 성화는 몬트리올로 주자에 의해 옮겨졌다. 개최 도중 성화가 비바람에 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관리자가 담배 라이터로 다시 불을 붙였으나 조직위원회는 다시 이 성화를 끄고 보관해 두었던 예비 성화로 다시 점화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회선언으로 막을 올린 몬트리올 올림픽은 근대5종·농구·레슬링·배구·복싱·사이클·수영·승마·양궁·역도 등 총 21개 종목, 198개의 메달을 두고 92개국 6,084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치밀한 대회 운영이 돋보였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갈등도 있었다. 상황은 뉴질랜드가 인종 차별 정책을 고수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친선 럭비 경기를 하면서 시작됐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뉴질랜드에 대해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캐나다 정부는 뉴질랜드의 올림픽 참가를 허가한 것이다. 이에 아프리카의 26개 국가들이 대회를 보이콧하여 참가국이 전 대회에 비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 결과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이 아닌 사륜 대회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캐나다 정부는 중화민국의 국호를 사용한 대만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아 스포츠와 정치를 분리한 규정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몬트리올 올림픽 역시 다양한 세계신기록을 쏟아내며, 스포츠 역사를 다시 쓰는 열광의 축제였다. 육상에서는 작은 섬나라인 트리니다토바고·자메이카·쿠바가 남자 100·200·400·800 m를 모두 휩쓸었다. 400 m는 ‘지구력의 스프린트’가 요구된다. 사실 제 아무리 완벽한 몸을 가진 선수라 해도 30~35초 이상 최고의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산소 고갈 상태에 이르기 때문. 쿠바의 알베르토 후안토레나는 400·800 m 전문가로 남자 육상 800 m에서 세계신기록 세웠다. 헝가리의 미클로스네메스는 남자 투창 경기에서 90 m의 벽을 허물고 94 m 58 ㎝로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며, 미국의 에드윈 모제스도 남자 40 m 허들 경기에서 47초 64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새로이 적용된 규칙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수영 종목에서 처음 선수들에게 고글 착용을 허용했다. 여자 경기에 농구, 핸드볼, 조정이 추가됐고, 영국의 앤 공주가 영국의 승마 여자 대표선수로 참가하였다.
앤 공주는 출전 선수 중 성별감정을 받지 않은 유일한 선수로 기록이 남아있다. 올림픽 최종 결과 캐나다는 은메달 5개와 동메달 6개를 얻는 데 그쳐 하계 올림픽 역사상 금메달이 없는 첫 개최국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72명의 선수단이 레슬링·배구·복싱·사격·유도 등의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종합성적 19위를 차지했다. 레슬링 패더급에 출전 한 양정모 선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금메달을 획득해 우리나라 스포츠의 역사를 다시 썼다.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난 양정모 선수는 고교 시절부터 레슬링을 시작해, 1970~1979년 9년 연속 한국 레슬링 페더급 자유형에서 선두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에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로 세계 정상에 오르며 ‘국민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



14세 소녀의 기적같은 도전과 승리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는 바로 나디아 코마네치다. 루마니아 출신의 나디아 코마네치는 정수리에 물이 차는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의사는 그녀가 단명(短命)하거나, 목숨을 부지해도 정신장애가 동반할거라 진단했다. 하지만 ‘희망’과 ‘행운’이라는 뜻의 나디아란 이름 때문일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녀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세계 정상에 섰다. 그리고 그 기록은 여태껏 깨지지 않고 있다.
여기 코마네치의 이름을 딴 이단평행봉 동작 두 개가 있다. ‘코마네치 살토’, ‘코마네치 내리기’다. 이 중 살토(salto)는 공중돌기를 뜻하는데, 이를 연기하려면 고봉(高捧)을 잡고 반듯이 매달린 자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어서 고봉에서 손을 때고 몸을 날려 다리를 벌린 채 앞으로 공중돌기를 한 다음 고봉을 다시 잡는 것이다. 체조 기술 난이도의 최고인 슈퍼 E등급으로 분류된 이 동작은 세계 체조 선수들 중 극소수만 연기할뿐더러, 시도조차 두려운 묘기다. 바로 그녀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 연기다. 코마네치 살토가 어려운 이유는 실수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체조에서 대부분의 기술은 작은 실수가 허용된다. 도중에 살짝 빗나가도 성공했다 평가받을 수 있지만, 코마네치 살토는 한 치의 빗나감도 허용되지 않는다. 코마네치가 ‘완벽함’의 대명사인 이유다.
체조는 중력의 법칙을 피할 수도 있다는 순간의 환상을 안겨준다. 엄청난 자기수양과 우아함이 요구되고 큰 힘과 용기, 초자연적인 공간 인식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바로 코마네치였다.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세계의 모든 시선이 코마네치로 향하기까지 그 어떤 것도 ‘우연’은 없었다. 하룻밤 사이 혹은 그날의 컨디션과 운이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위대한 체조선수였다. 1975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마루운동을 제외한 모든 종목을 석권했던 것. 체조요정 코마네치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모두 7차례 1.0(사실은 10.0)만점을 받고 3관왕에 오른다. 올림픽 역사와 체조 역사를 통틀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기록을 세운 14세 소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연습을 한다. 세 차례 세계 선수권을 제패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두 개를 추가했다.


루마니아의 영웅이자,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여자선수로 뽑힌 그녀지만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당시 루마니아 정부는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의 실정으로 상당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실제 그녀는 올림픽 이후 정부의 통제 하에 그 어떤 영광도 누릴 수 없었다. 이후 목숨을 건 미국 망명을 했고, 그녀의 삶은 주변의 여러 사건으로 ‘희망’이 없게 느껴진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나디아’아니던가. 나디아 코마네치는 후배들을 지도하고, 자선사업을 펼치며 체조선수로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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