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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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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도량형 개혁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자2016-03-02 19:31
  • 분류카드뉴스
  • 조회수576

1789년 프랑스는 혁명의 도가니 속에 있었다. 성난 군중들이 왕의 폭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점거하고 농민들은 지주에 맞서 봉기하였다. 당시 프랑스 왕이 자유와 평등을 내용으로 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승인하지 않자, 파리의 군중들은 왕이 사는 베르사유로 진격해 왕의 가족을 파리로 데려와 감금했다. / 삽화 : (저울과 자 등이 놓여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파스칼과 데카트트 외 1명),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도량형을 만들 것이다. / 프랑스 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다른 혁명도 일어나고 있었다. 새로운 도량형 질서를 세우는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도량형 체계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프랑스 혁명 전에 프랑스를 다녀간 아서 영이란 영국인은 프랑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도량형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프랑스에는 이해하기 힘들만큼 무수히 많은 도량형이 있다. 지방마다, 교구마다, 마을마다 모두 제각각이다”라고 기록했다. 프랑스가 도량형 개혁을 시도할 당시 그 중심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있었다. 아카데미는 1635년경부터 데카르트, 파스칼 등 저명한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모임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아카데미가 도량형 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의 발전 덕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측정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여러 측정 장치들이 개발되고 개선되었다. 과학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길이를 측정하는 측량도구와 시각을 측정하는 시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미세한질량 차이도 측정할 수 있는 저울도 있었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달이 국가 발전에 유익하게 쓰이기를 원했다. 그것이 바로 도량형 개혁이다. 당시 아카데미에는 오늘날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1794)가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도량형 개혁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1790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전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왕은 라부아지에를 비롯해 아카데미 학자들에게 도량형 통일의 장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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