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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m의 작고 네모난 화폭에 그리는 수많은 이야기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9-10-07 16:42
  • 분류함께 걸어가다
  • 조회수1643

3 cm의 작고 네모난 화폭에 그리는 수많은 이야기
우표디자이너 박은경(우정사업본부 우표디자인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 나의 사람, 보고 싶소. ……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합한 숫자보다 백만 배 더 당신을 사랑하오.” 서른 여섯 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러시아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가 연인 릴리 브리크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되돌아보면 누구에게나 편지에 담아 전했던 사랑의 문장이 있었다. 스마트폰이 아닌 편지가 소식을 전하는 중요한 매체였던 시절, 집집마다 서랍 속에 우표가 있던 그런 시절에 말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8월의 어느 날, 우표라는 3 cm의 작고 네모난 세상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러 세종시로 향했다.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우표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우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조금 낯설다. 우표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국내에 단 한 곳밖에 없는 우정사업본부 우표디자인실이다. 그곳에서 20여 년간 근무해온 박은경 디자이너. 가랑비가 부딪히는 유리 창가에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랑 시각디자인학원을 다니면서 광고공모전에 나갔던 게 진로를 바꾼 결정적인 계기였죠. 아마 멀티폰이었을 거예요. 딸 부잣집에서 자매들이 서로 자기 전화일 거라고 티격태격하다 한 명이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리는 스토리였죠. 광고 콘티를 짜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냈는데 금상을 탔더라고요.”  

 

원래 역사학, 사회학 쪽에 관심이 많아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던 박은경 디자이너.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2년 연속 금상과 은상을 수상하면서 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은 새로운 곳을 향하게 됐다.  

 

“하다보니까 ‘이게 바로 내 길이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전공을 바꾸려고 아예 편입까지 하게 됐죠.” 시각디자인 중에서도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았던 박은경 디자이너. 졸업 후 그는 광고회사에 입사해 일러스트 그리는 일을 했다.   

 

하지만 첫 직장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야근에 주말도 거의 없다시피 한 바쁜 업무에 지쳐, 결국 퇴사를 하게 된 그는 한동안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또 다시 진로를 고민했다.   

 

“당시에 다른 친구들은 취업해서 매일 출근하는데, 혼자 백수처럼 지내고 있으니 몸은 편해도 걱정이 많았죠. 그때 한 친구가 학교에 들렀다가 우연히 공고를 보고 제게 알려줬어요. 한번 지원해 보라고요. 포트폴리오로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2차로 면접과 실기시험을 봤죠.”  

 

1996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마침 그때 친구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게시판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쯤 박은경 디자이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림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주어진 컷을 그리는 실기시험은 광고회사에 다니며 빨리 그리는 데 단련된 그에게 꽤 유리했다. 그렇게 1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표디자이너로 뽑혔다.  

 

 

 

 

우표디자인을 통해 만나는 세상  

 

미국의 32대 대통령인 루즈벨트는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고 했다. 우표는 ‘우편요금’을 냈다는 표시만은 아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통, 인물, 자연이 담기는 작품이며 기록이다. 그 시대의 화풍과 경제상황도 담겨 있다.  

 

“우표디자인에선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확실한 내용과 전달력도 중요해요. 예를 들어 물고기를 그린다고 하면 그 종(種)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물론 돌이나 수초 같은 사는 환경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하죠. 꽃이 주제일 때는 정확한 학명 표기도 신경 써야 해요. 디자인 작업뿐만 아니라 조사와 고증이 중요해요.”  

 

우표는 엄청난 시공간을 아우른다. 세계 곳곳으로 전해지고 영원히 기록으로 남는다. 때문에 우표디자이너에게는 미적 감각과 창의력은 기본이고, 사실을 정확히 담는 사관(史官)과 같은 책임감이 필요하다. 문헌자료 검색과 현지답사, 전문가들의 자문과 심의를 통해 우표 한 장이 탄생한다.  

 

“한 사람이 한 것처럼 보이지 않죠? 그때그때 주제에 맞게 정말 다양한 스타일의 디자인을 해요. 도라지꽃의 경우는 세밀화로 표현했고, 캐릭터 같은 건 단순하면서도 귀엽게 표현했죠. 어떤 화가의 미술작품이라든지 만화가 고유의 캐릭터 같은 일부 주제를 빼고는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모든 우표의 그림을 저희가 그리죠.”  

 

우표를 디자인하는 곳은 대한민국에 우정사업본부 우표디자인실밖에 없다 보니,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는다. 때문에 우표디자인을 통해 몰랐던 분야를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되기도 한다.  

 

“우표의 주제는 1년 전에 미리 결정돼요. 매년 반복되는 주제도 있지만 그해에 특화된 주제도 많은데요, 기해년에는 돼지 캐릭터가 있을 거고,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는 올림픽을 모티브로 한 우표를 만들기도 하죠. 올해는 기본단위 재정의가 공식 시행되기 때문에 단위를 주제로 한 우표를 디자인하게 됐어요.”  

 

 

 

주제가 결정되고 자신에게 맡겨지면 연구가 시작된다. 박은경 디자이너는 작년 겨울부터 기본단위 재정의에 대한 자료수집과 공부에 돌입했다. 단위의 역사부터 기본단위들이 각각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 등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쉽지 않은 연구였다.  

 

“전, 우표를 디자인할 때 누가 봐도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10~20년이 지난 뒤에도 의미를 알 수 있어야 좋은 우표일 거예요. 세계측정의 날 기념우표를 디자인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게도 생소하지만 단위, 그리고 측정표준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정확하게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했죠.”  

 

재정의가 시행되는 4개의 단위를 아이콘으로 디자인해 넣고 변지에는 각 단위의 기본상수 값을 넣었다. 기본단위 재정의 기념우표도 ‘내가 디자인한 우표는 어디에 가서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많은 고민을 통해 디자인했다.  

 

“내용이 어렵다 보니 표현은 밝고 친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선보다는 둥글둥글한 선을 쓰고 색상도 파스텔 계열을 써서 무겁지 않게, 따뜻하게 표현했죠. 참, 또 하나 특별히 신경쓴 게 있는데요. 띄어쓰기를 틀리거나 상수를 잘못 표기할까봐 계속 확인하고 대조했던 게 생각나네요.”  

 

 

 

 

행복한 우표디자이너  

 

앞으로는 또 어떤 주제가 주어질지 모른다. 그가 좋아하는 일러스트에 어울리는 주제일수도 있고 또 다른 스타일과 기법이 맞는 주제일 수도 있다. 반복되는 업무지만 어떻게 보면 늘 새로운 일을 하기에 즐겁다.  

 

“‘우표 발행은 국가의 주권’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나라 고유의 것들이 담기죠. 예를 들어 DMZ의 자연이 담긴 우표는 우리나라에만 있잖아요. 앞으로도 그 고유의 모습, 고유의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우표에 담아내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우표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박은경 디자이너. 그는 자신의 손길이 담긴 우표가 세계 어딘가, 그리고 먼 미래의 언젠가로 전해지는 상상에 설렌다. 어쩌면 스쳐갔을지도 모르는 길. 우표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것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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