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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S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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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그린 그림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8-09-03 10:03
  • 분류함께 걸어가다
  • 조회수3050

미술가가 도화지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조명디자이너는 무대나 공간에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프랑켄슈타인, 벤허를 비롯해 수많은 공연의 조명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렸던 민경수 조명디자이너. 오랜 시간 해온 작업을 그는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했다.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 그러나 그 그림이 너무 드러나서는 안 된다. 최고의 조명은 관객들이 느끼지 못하는 빛 그리고 관객들이 공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돕는 빛이라 믿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있는 듯 없는 듯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의 주제, 안무, 무대 디자인, 장면들에 완벽하게 녹아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빛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빛의 진출과 후퇴, 경중감, 빛의 색조와 광원의 성격 등 빛의 특성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민경수 디자이너를 만나 조명디자이너가 그리는 빛의 세계에 대해 들어 보았다. 글. 신지선 사진. 김하람  

사진 : 조명디자이너 민경수

조명은 공연의 최종 메이크업이라는 민경수 디자이너
조명디자인 의뢰가 오면 일단 작품을 파악한다. 시대적 배경은 몇 세기인지, 주제는 무엇인지 연출가와 많은 이야기도 나눈다. 그런 다음 무대연출을 확인한다. 안무가들과 회의도 하고 연습하는 것을 보면서 이미지를 잡아낸 후에는 빛을 생각한다. 조명기마다 광선이 가진 특성이 있다. 어떤 조명기는 미술가의 극세필처럼 가는 광선도 있고 좌중을 압도할 만큼 강한 광선도 있다. 조명디자이너는 무대를 도화지 삼아 빛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때 사용되는 빛만 100여 종이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인공광원인데 100여 종의 빛도 하나만 사용되는 경우가 없다. 이 무대에 어떤 옷을 입히고 어디에 포인트를 줄 것인가? 포인트가 될 빛은 어디에 얼마나 뿌릴 것인가? 장면마다 캐릭터마다 수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둘 씩 장면이 채워진다. 때로는 아련하게, 또 때로는 강렬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타는 빛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도면화 작업을 통해 조명을 배치시켜요. 스테이지 쪽, 객석 쪽, 세트 쪽 평면도를 만드는 거죠. 인물들에게 비추기 위한 각도는 적합한 지 여부도 체크해야 하죠. 색도 선정하여 도면에 표기하는데 조명에 사용하는 색지의 색은 불리는 이름이 있지만 색지 제조사에서 정해놓은 숫자로 기입해요. 조명을 하는 사람은 숫자만 봐도 이것이 무슨 색인지 알죠. 도면이 완성되면 공연장 셋업을 시작해요. 원하는 위치에 선택한 장비들을 설치한 후, 각각의 등기구들을 용도에 따라 초점 맞추는 작업을 하죠. 그 다음은 장면과 장면의 빛의 밝기 조절에 들어갑니다. 조명 셋업이 마무리된 후에는 각각의 등기구들을 조정하기 위한 채널번호들을 일람시킨 문서들을 가지게 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매직시트라고 해요.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숫자만 나열되어 있는 단순한 문서 같아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이 문서를 보고 무대 위의 빛의 장면을 그릴 수 있죠. 이런 시트를 이용한 작업을 통해 작품별로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600여 장면들을 그려내야 한 작품이 끝나요. 여기까지만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조명디자이너가 할 일은 아직 남아 있죠.”  


다음엔 리허설이 진행된다. 각각의 장면마다 달라지는 조명, 인물과 배경에 따라 그만의 빛이 따라 붙는다.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살펴본다.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빛은 없는지, 불필요한 빛은 없는지 등. 드레스 리허설을 한다. 캐스팅별로 다시 빛을 쏘아본다. 비로소 관객과 만나는 시간, 프리뷰. 이때 다시 한 번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빛을 체크하고, 수정한다. 마침내 본 공연이 시작되면 그제야 객석에 앉아 메이크업이 끝난 무대를 바라볼 수 있다. 관객의 마음으로. 비로소 한 작품이 조명디자이너의 손을 떠나는 순간이다.
 

관객의 요구만큼 더욱 다양해지는 조명기
공연에서 빛은 그만큼 큰 의미로 다가온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암흑의 세계. 어디서 어떤 각도, 어떤 색조, 어떤 밝기로 들어오느냐에 따라 무대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조명디자이너의 역할이 큰 이유다. 현재의 조명디자이너들은 과거와 달리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폭도 넓다.“조명기의 종류가 몇 가지 없었던 과거에는 한 장면에 하나의 조명만을 썼어요. 그 장면에 최적화시킨 것만 찾아내고 연결고리에 장비를 다시 활용해도 됐어요. 때문에 표현에도 한계가 있었죠. 지금은 조명기가 엄청나게 발전했어요. 시대가 변하면서 관객들의 요구도 많아졌고 무대에서 다양한 장면을 다양한 미장센(연출)으로 만나게 하기 위해 도구의 폭이 넓어진 거죠. 과거에는 색깔도 하나만 썼다면 이제는 여러 기능들을 합쳐놓은 조명들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움직이면서 자동으로 색깔과 모양을 바뀌게 하는 등 디자이너가 더 재미있게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거죠.” 그만큼 편하기도 하지만 도전해야 하는 것도 많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전기스파크도 나오는데 이것도 조명으로 만든 것이다. 장면에 있어서의 조명효과도 디자이너마다 작품마다 해석이 다르다.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조명디자인도 백인백색이 되는 것이다.

인공광원을 쓸 때 알아야 하는 빛의 성질
“인공광원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태양광선은 자연의 색으로 빨주노초파남보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요. 그러나 조명디자이너가 쓰는 인공광원은 달라요. 백열등 같은 것은 적색광 계열의 분포도가 많기 때문에 스펙트럼을 통해 보면 적색광 부분이 넓어요. 형광등은 반대로 청색광 계열의 분포도가 넓고요. 형광등 아래서 보는 청색옷과 태양 빛 아래서 보는 청색옷은 느낌이 다릅니다. 조명디자이너가 이런 인공광원의 특징을 모르면 초보적인 실수를 하게 돼요. 하나의 색을 끼우면 그 색만 나올 거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이에요. 오렌지색을 끼웠다고 오렌지색만 나오는 것이 아니죠. 오렌지색을 원한다면 그 조명기구의 최대치를 켜주어야 해요. 빛이 죽으면 적색광 계열의 분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빛에는 또 진출과 후퇴의 성질이 있다. 똑같은 차라도 색의 차이로 인해 크기가 달라 보인다. 검정색보다는 흰색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흰색은 진출색으로 확장되어 보인다. 검정색은 후퇴색이라 작아 보이는 대신 경중감이 있다. 무거운 느낌 말이다. 그래서 검정색 차는 무거워 보이고 또한 권위적으로 보인다. 살이 빠져 보이고 싶고 좀 더 공적으로 보이고 싶을 때 사람들은 검정색 옷을 입는다. 빛에는 심리적인 면도 있다. 어떤 빛을 썼느냐에 따라 무대가 따뜻해 보일 수도, 침울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조명디자이너라면 색채 심리나 연상에 대해서도 숙지해야 한다.  


빛의 특성을 영리하게 이용한 작품들
“뮤지컬 <캣츠>에도 빛의 특성을 이용한 장면이 있어요. 바로 도둑고양이가 눈 깜짝 하는 순간 사라지는 장면이죠. 조명디자이너는 이 장면을 어떻게 만들어 낼까요? 순간적으로 섬광을 관객들에게 들이대면서 조리개를 순간적으로 닫히게 하면 됩니다. 망막이 밝음에서 어둠으로 적응하는 시간을 이용하는 거죠.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빛이 쏟아지면 순간적으로 눈이 안보이잖아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눈앞의 배우가 사라진 것으로 생각해요.” 마술 또한 조명에 많은 빚을 지는 장르다. 마술 공연을 할 때는 조명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마술 공연의 조명은 기법 상 마술의 형태에 따라 조명 각도가 정해져 있다. 손 뒤가 보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관객과 같은 방향에서 빛이 들어와야 한다. 무대 위에서 날아다니는 피사체는 대부분 낚시 줄로 묶여 있지만 반짝이 배경 막에 조명을 비추어 현란하게 하는 것으로 관객의 착시를 만들어 보이지 않게 한다. 사실 무대 위에는 수많은 줄들이 묶여 있는 것이다.  

사진 : 조명디자이너 민경수

광학과 기술, 예술의 융합 분야, 조명디자이너
조명은 사실 종합 예술이다. 빛을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전기와 제어도 알아야 하며 미학적 부분에도 조예가 깊어야 한다. 민경수 디자이너는 그런 의미에서 잘 준비되어있다. 사회 진출은 전기 분야로 했고 대학은 전자계산학과로 갔다. 대학을 다니고 싶어 도전했던 서울시 공무원. 당시 일반 회사에서는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없었고 때문에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공무원을 택했던 것이다. 본래부터 운명의 방향이 이쪽이었는지 세종문화회관 조명실로 발령을 받았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 1988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문화와 컬러TV, 핸드폰 등등이 걷잡을 수 없이 영향력을 키워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명에 꽂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과거에 배웠던 전기, 제어, 캐드 등의 기술이 활용되었다. 갈증을 느꼈던 미학 부분은 무대미술아카데미, 일본 연수, 연극영화학과 입학과 졸업 등으로 채워갔다. 과학과 기술, 예술이 집합되어야 하는 조명디자이너로서 밟아야 할 코스를 모두 거친 셈이다. “사람들이 가끔 묻곤 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술 감성이 무뎌질까 두렵지는 않냐구요. 사실 그것 때문에 감성을 깨우는 트레이닝을 많이 하죠. 미술계의 흐름, 특히 색은 어떤 쪽으로 변화하는 지 연구해요. 웹서핑도 많이 하구요. 음악적 감각도 알아야죠. 랩도 듣고 그 안에 나오는 빛도 계속 연구합니다. 어차피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트렌드에 결코 뒤떨어져서는 안 되거든요. 전 오히려 마흔이 넘는 것이 조명디자이너로서는 더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이쪽엔 정년퇴직이 없잖아요.” 이 일을 하면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올린 작품들이 생명력을 더해서 대중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다.  

그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있는 한, 또한 조명기와 도구와 문화·예술 분야가 계속 발전하는 한 조명디자이너의 미래는 앞으로도 그들이 다루는 빛처럼 밝을 것이다. 빛과 색과 감성으로 만들어지는 조명디자이너의 세계가 새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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