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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모든 사람 모든 시대를 위한 단위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8-09-03 09:31
- 분류지식을 나누다
- 조회수7924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수많은 단위가 생겨나고 쓰이고 사라지고 또다시 생겨났다. 이 과정 속에서 단위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게 됐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단위 중에서 길이의 기본 단위인 미터(m)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가진 것이 또 있을까? 격동과 혼란의 시기인 프랑스 혁명 중에 만들어져 새로운 도량형 정립의 시작이 되고, 인류의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진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된 미터.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글. 박세란 일러스트. 최명미
제각각이어서 불편하고 불평등했던 옛 도량형
아주 오래전에 쓰인 길이의 단위는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원전 3,000년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축할 때 사용된‘큐빗(Cubit)’이라는 단위가 대표적인 예다. 큐빗은 파라오의 팔꿈치에서 가운뎃 손가락 끝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한 단위는 흔히 사용되기도 했지만 폐해도 상당히 많았다. 사람마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재는 사람에 따라 길이가 달라져 혼란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표준화된 단위의 필요성은 어느 국가나 절감하는 것이었고, 국가의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다. 우리나라 또한 표준화된 도량형을 정립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가 이어졌다. 조선시대, 특히 세종 대에는 재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인 결과를 낳는 도량기를 교정하고, 새로운 도량기를 만들어 전국에 나눠주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일관성 없는 도량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백성이 없도록 두루 살폈다. 18세기 프랑스 또한 지방마다, 마을마다, 재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단위에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사용된 단위가 약 250,000개였다고 하니 그 혼란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농민들의 피해가 컸는데, 그 이유는 영주의 잣대에 따라 소작료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장 객관적이고 기본적인 단위인 미터
프랑스 내에 도량형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한데 모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였다. 1780년대 후반 루이 16세는 새로운 도량형 체제를 위한 임무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부여했다. 이는 단위에 대한 낡은 관행을 허물 절호의 기회였다. 1790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새로 통일된 단위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기준으로 만들자.”라는 도량형 개혁안을 제시하며 방향성을 하나하나 잡아 나갔다.
1791년 프랑스 과학자들은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자오선(子午線) 길이의 1,000만분의 1을 새로운 단위 미터로 한다.”고 공표했다. 과학자들이 1 m의 정의를 내렸지만 실제로 이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또 거대한 지구를 측정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지구 자오선의 일부분(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의 거리)을 측정하여 전체를 계산하기로 했다. 이 실측 과정에 참여한 과학자는 장 밥티스트 조제프 들랑브르와 피에르 프랑수아 앙드레 메솅이다. 이들은 측정 기간을 1년으로 예상했으나, 혼란스러운 프랑스 혁명과 전쟁 등을 겪으며 7년이 지나서야 실측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결과 1799년 12월 10일, 프랑스에서 처음 1 m가 제정됐고, 1875년 미터협약이 체결돼 미터법(미터(m) 및 킬로그램(㎏)을 기본으로 한 십진법의 국제적인 도량형단위계)을 국제적인 표준으로 채택했으며, 1889년 제 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미터를 확정하여 국제적인 표준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885년에는 들랑브르와 메솅이 측정한 값을 토대로 미터원기를 제작했다. 국제도량형국(BIPM)에 소장돼 있는 미터원기는 백금 90%, 이리듐 10% 합금을 사용하며 단면을 X자형으로 만들어 잘 구부러지지 않도록 했다. 미터협약 가맹국에는 국제미터원기를 정밀하게 비교측정한 부원기를 제작해 분배했다. 우리나라 또한 미터협약 가맹국으로서 광무 6년(1902년) 10월 21일 미터법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국제미터원기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새로운 도량형 체제를 위한 연구를 시작할 때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기준으로 만들자고 했지만, 미터원기가 온도 변화와 경년 변화(재료의 성질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서서히 변화하는 일)를 미세하게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불어 예기치 못한 재해로 인해 미터원기가 손상되었을 경우, 미터원기를 원래의 것과 똑같이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있었다. 이에 과학자들은 미터를 재정의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미터의 새로운 정의
미터의 재정의는 두 번 이루어졌다. 1960년 제 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1 m를 ‘파장이 가장 안정된 크립톤(Krypton) 원자의 등황색선 스펙트럼의 진공 중 파장’으로 재정의한 것이 첫 재정의다. 즉, ‘1 m는 Kr86 원자스펙트럼의 진공 중 파장의 1,650,763.73배와 같은 길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1975년 제 16회 국제측지학 및 지구물리학총회에서 길이의 기준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뚜렷한 한계가 존재했다. 원자를 사용하여 정의했다는 점에는 의미를 둘 수 있지만 크립톤 램프에서 나오는 빛의 세기가 약해 실제로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미터의 재정의가 완성된 것은 1983년에 열린 제 17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다. ‘1 m는 빛이 진공에서 1/299 792 458 초 동안 이동한 경로의 길이이다.’라고 정의됐다. 이로써 미터의 정의는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 기준으로 다시 세워졌다. 파손이나 소멸의 염려도 없고 정밀도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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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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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높아졌다.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단위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측정과 정의가 가능해진 것이다.
미국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는 “미터법은 인쇄술 이후 인간의 창의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안겼다고 할 수 있다. 미터법은 좀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했지만, 그 결과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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