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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말뫼의 눈물’ 머금은 1,600 톤급 타워크레인, 그리고 울산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8-08-03 13:40
- 분류지식을 나누다
- 조회수3037
한파가 기승인 시리도록 맑은 날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울산을 향해 차를 달렸다. 세계최고의 조선회사가 있는 공업지역. 울산 동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울산 동구는 한반도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내륙에는 녹지와 휴양지가 즐비하다. 조선업의 메카, 낭만의 도시. 내 마음은 서둘러 울산 동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글. 성혜경 사진. 김병구
인양능력 1,600톤의 타워크레인
울산 도심을 지나 동구에 들어섰다. 동구를 순환하는 좌·우측 도로와 연결된 염포동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10분쯤 달렸을까? 멀리 출렁이는 동해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전 해안이다. 반질반질한 몽돌들이 해안을 뒤덮고 있었다. 몽돌이 파도에 쓸려 올라갔다 쓸려 내려오며 내는 소리에 마음이 편하고 느긋해졌다. 다시 차를 타고 시내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머지않아 눈앞에 거대한 타워크레인이 나타났다.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대하고 육중한 모습.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높이 128 m, 폭 164 m, 자체중량 7,560 톤, 인양능력 1,600 톤. 왜 ‘골리앗 크레인’인지 설명이 필요 없었다.
골리앗 크레인은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바로 ‘말뫼의 눈물(Tears of Malmoe)’이다. 스웨덴 말뫼의 세계적인 조선업체 코쿰스(Kockums)가 폐업하며 이 타워크레인을 내놓았고 그것을 2002년 현대중공업이 단돈 1달러에 매입했다. 막대한 해체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실제로 이 크레인을 해체, 선적, 설치,
개조, 시운전 하는데 무려 220억 원이 들었다고한다. 드디어 2002년 9월 25일 크레인의 마지막 부분이 해체되어 선적이 이루어졌다. 이 때 말뫼 주민들은 크레인이 배에 실려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했다. 이 장면은 스웨덴 국영방송을 통해 방송됐는데 장송곡과 함께 ‘말뫼의 눈물’이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크레인은 현대중공업의 울산 육상건조시설에 설치됐으며 2003년 하반기부터 가동에 들어가 현대중공업이 세계최초로 육상건조 공법을 성공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단돈 1달러에 스웨덴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타워크레인. 1,600 톤을 들어 올리는 골리앗의 당당함 뒤에 눈물어린 사연이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위기 속에, 20세기 초 세계 조선업계의 선두주자였던 스웨덴의 말뫼에서 일어난 눈물의 사건을 반추해보았다.
바다와 숲과 바위
현대중공업에서 10여 분 떨어진 곳, 대왕암이 보이는 해안가에 도착했다. 황색 바위와 푸른 해송들이 대비를 이루는 경관은 추위도 잠시 잊을 만큼 수려했다. 대왕암으로 이어진 길가에는 1만여 그루의 해송이 우거진 대왕암공원이 있다. 숲의 면적은 무려 94만 2,000여 ㎡. 이곳은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는데 러·일전쟁 이후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나무를 심어 숲이 되었다고 한다. 숲길이 끝날 무렵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새하얀 등대 하나가 나타났다. 등록문화재 제106호 울기등대다. ‘울기(蔚埼)’란 ‘울산의 끝’을 의미하는데, 처음 세울 당시의 명칭은 ‘울기등간(蔚埼燈干)’이었다고 한다. ‘울산의 끝에 있는 등불 방패’라는 뜻처럼 군사적인 목적에서였다. 1905년 일제가 방어진항 유도를 위해 이곳에 목제로 된 등대를 세운 것이다. 이후 콘크리트로 새로 구축해 무려 80여 년 동안 사용한 역사 깊은 등대다. 등대의 불빛은 매일 일몰에서 일출까지 켜졌는데 그 빛은 33.3 ㎞까지 나아갔다. 이제 밤바다를 밝히는 기능은 잃었지만 모
니터를 통해 시를 읽을 수 있는 문학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대왕암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은 1984년 군산 어청도 근해에서 포획한 참고래의 턱뼈다. 고래
턱뼈 사이를 지나자 바로 육지와 대왕암을 연결하는 대왕교였다. 깎아지른 해안절벽과 푸른 바다. 거대한 바위 사이 바닷물은 무섭도록 짙었다. 이곳은 ‘용추수로’라 하는데 용이 바닷물 속에 잠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왕암 위로 난 길에는 탕건바위, 처녀봉, 다릿돌, 할미바위 등 이 모양 저 모양의 바위들이 이어졌다. 자연의 손이 아니고는 빚어낼 수 없는 작품. 경이로울 뿐이었다.
일몰 속 울산 해안도로와 시내도로를 거쳐 울산대교 전망대로 향했다. 3층 실내전망대로 들어서자 통유리 너머로 석양이 내린 울산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원스레 뻗은 울산대교가 지척에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울산의 시가지와 자동차, 석유화학, 조선해양 등 산업단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우리나라 근대 조선산업이 시작된 방어진항과 대한민국 수출산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 울산항, 그리고 멀리 간절곶, 신불산, 대왕암도 내다보인다. 저녁이 되자 또 다른 장관이 360도로 전망대를 둘러쌌다. 지평선부터 번져나가는 감빛 노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온화해졌다. 어둠은 점점 하늘을 잠식했다. 석유화학단지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도시의 불빛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잡생각이 사라지고 그저 풍경에 젖어 있었다.
고래의 추억
이튿날, 울산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장생포로 향했다. 고래잡이가 금지된 이후 쇠락해가던 장생포는 고래관광을 기반으로 재기를 이뤄냈다. 그야말로 집채만 한 고래와 그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 고래를 삶는 구수한 냄새는 사라졌지만, 그 모든 기억들은 고래박물관에 간직되어 있다. 특히 실제 고래뼈와 고래수염, 귀신고래의 모형은 괴기스러우면서도 자꾸 눈이 갔다.
마을은 미술마을로 거듭나있었다. 한때 마을은 도심 속 외딴 섬처럼 낙후된 지역이었고 슬럼가로 불렸다. 이 마을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영화 <고래를 찾는 자전거>의 배경이 되면서부터다. 이후 공공미술 사업이 펼쳐지면서 마을은 거대한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마을 입구에는 ‘장생포, 고래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서있고, 그 반대편 건물은 포경선을 지붕에 얹고 있었다. 포경산업이 활황을 누렸던 1960~1970년대 장생포의 풍경을 그대로 복원한 장생포 옛 마을을 거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옛날 학교, 우체국, 의원, 구멍가게, 방앗간, 이발소, 전파사, 사진관, 그리고 고래해체장과 고래착유장 등에 그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쩌면 역사는 상승과 하락, 흥성과 쇄락이 거듭되며 만들어지는 물결일는지 모르겠다. 울산을 떠나는 길. 장생포의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말뫼의 눈물’의 사연이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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