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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같은 듯 다른 인품과 철학,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인 대가들
- 작성자최고관리자
- 작성일2017-08-18 11:05
- 분류함께 걸어가다
- 조회수3035
현실 참여를 두고 다른 입장과 삶 ?
퇴계를 두고 꼭 현실참여형 학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조선의 왕과 신료들이 거듭되는 사화로 인해 꽉 막혀버린 정국을 풀 지혜를 퇴계로부터 찾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 이 때문에 퇴계는 34 세에 벼슬을 시작하게 된다 . 그러나 너무도 아름다운 그의 성품으로는 벼슬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던 그는 결국 70 세에 사망할 때까지 조정에서 140 여 직종에 임명되었지만 무려 79 번이나 사퇴하는 물러남의 극한을 선보였다 . 그는 왜 한사코 명예와 권력이 보장된 벼슬자리를 물러나고 싶어만 했던 것일까 ? 그의 사상과 철학을 많은 학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퇴계는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했다기보다 오히려 ‘ 비워둠 ’, ‘ 내려놓음 ’ 이라는 보기 드문 행동으로 세상과 대화하려 한 것이 아닐까 ? 조선 중기 정치가 혼탁하던 시대 , 반대를 위한 반대가 판을 치던 시절에 퇴계는 자신의 정치 참여가 “ 젊은 시절 세상에 나간 것은 어리석은 방황이었다 .” 고 고백하며 선비는 벼슬 바라기 보다 진정한 학문에 몰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남명은 퇴계보다 더 나갔다 . 그는 아예 과거를 단념하고 재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4 대 사화로 지식인의 싹이 말라버렸던 조선사상 학문계에 조광조가 꿈꾸었던 유교와 왕도정치를 실현해 보고자 힘썼던 진정한 산림유 ( 山林儒 ) 였다 . 그는 민초로부터의 개혁을 꿈꾸었다 . 이 두 거장의 가르침에 제자들은 좀 더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 학봉 김성일 , 서애 류성룡 등 퇴계의 제자들은 현실 정치에 깊숙이 몸담았고 서애의 경우 임진왜란이 나자 최고전략가로 영의정으로 전란을 수습하며 인재를 공급하는 지도부에 들어가 있었다 . 에 반해 남명은 제자들과 함께 주류가 아닌 재야 세력을 구축하고 국정을 적극비판하며 실천적인 개혁을 호소하였다 . 퇴계의 제자 류성룡이 이순신 권율 같은 영웅을 불러내 전란에 임한 반면 남명의 제자인 곽재우는 의병의 삶을 통해 민초들의 저항과 투쟁을 몸소 보여주었고 정인홍은 대북파의 기수가 되었다 .
군주와 백성을 보는 서로 다른 눈
퇴계가 군주와 백성의 도리를 지키고 충과 효를 강조하며 , 성리학의 절대 지위를 지키려 했던 반면 남명은 당시 양반체제 하에서 상하 주종관계를 평등관계로 바로잡고 권력에 짓밟히던 민생을 ‘ 백성이 나라의 근본 ’ 이라는 시각으로 바꾸려 했다는 것이 가장 다른 점이었다 . 퇴계는 48 세 되던 해 단양 군수로 제수되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맡아 3 년을 연속해서 가뭄이 심하게 겹쳐 고생하던 백성들의 삶을 단숨에 바꾸어버렸다 . 퇴계는 부임하자마자 도대체 단양처럼 물이 많은 곳이 왜 가물어 농사조차 짓기 어려운 지를 살펴보았다 . 그리고는 단양에 여름철 홍수 때 풍부한 수량을 가둬두는 저수지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설치하는 일부터 시작토록 하였다 . 그렇게 하여 탁오대 옆 여울목에 저수지를 설치키로 하고 인원을 동원하여 복도소 ( 復道沼 ) 라는 저수지를 만들게 했다 . 그 후부터는 단양지방에 홍수나 가뭄이 오지 않아 고을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는데 침이 마를 정도였다고 전한다 . 단 9 개월의 임직 기간 내내 그가 얼마나 위민정신으로 일했던지 퇴계가 10 월에 풍기군수로 이임하게 되자 온 고을 백성들이 뛰어나와 임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을 정도였다 . 그는 다시 풍기 군수로 나아가서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소수 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만들었다 . 사액이란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현판을 달도록 한 것을 말한다 . 이 서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 이렇게 지방 관료로 최선을 다한 그는 얼마나 청빈하게 지내냈던지 군수직을 그만 둘 때 책 꾸러미 몇 개만 갖고 돌아갔다고 전할정도로 아무런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사랑과 존망을 한 몸에 받았다 . 그럼에도 그는 성리학과 정치판을 통째로 흔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 쉰이 넘어 잠시 명종에게 불려나온 퇴계는 명종이 21 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문정왕후에게 임금에게 정 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올려 최대의 실세였던 문정왕후를 놀라게 했다 . 그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충언이었다 . 그럼에도 그를 함부로 비난하기 어려웠던 것은 퇴계가 물러섬과 나아감에 있어서만은 원칙과 절도를 지켜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모두의 우러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 김해에서 18 년을 보내며 후학을 가르친 남명은 사림 ( 士林 )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며 영수 ( 領袖 ) 가 됐다 . 조정 ( 朝廷 ) 은 남명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했다 . 48 세 때 김해를 떠나 고향 토동으로 돌아간 남명은 계부당 ( 鷄伏堂 ) 과 뇌룡정 ( 雷龍亭 ) 을 지어놓고 후학 배출에 힘썼다 . 그는 명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 남명의 상소가 올라오면 임금이 불편해 할 정도로 할 말을 하고 살았다 . 사실대로 말할라치면 목숨을 걸고 할 말을 하는 사생결단의 직언이었다 .
제자들을 두고 갈라진 학풍과 당색
퇴계학의 제자들이 현실의 개혁을 꿈꾸며 주자학의 근본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면 남명학의 제자들은 실천을 중시하면서 기존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 주자학에서 보자면 분명 이단적인 가르침이었다 . 게다가 그 밑에는 민초들로부터 시작되는 진한 애민주의와 저항주의가 꿈틀거렸다 . 이 두 가지 차이가 퇴계학과 남명학의 차이를 낳았다 . 퇴계학의 추종자들은 정권에서 살아남았고 남명학의 추종자들은 정권에서 멀어졌다 . 퇴계의 제자들은 온건파로 정쟁에서 살아남아 임란을 수습했다 . 남명의 제자들은 영남의 3 대 의병장을 비롯해 50 여 의병장이 일 어날 정도로 현실참여형 강건파가 많았다 . 남명의 제자들 가운데 유명한 이로는 대북파의 기수 정인홍이 있다 . 그 외에도 김효원 , 동강 김우옹 , 한강 정구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등이 있다 . 남명의 제자들은 북인 ( 北人 ) 으로 불렸는데 훗날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 숙청당했다 . 그 결과 남명학이 퇴계학에 비해 홀대받는 결과를 낳았고 오늘날 퇴계학파는 일본과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이를 공부하는 후학들이 있을 정도이나 남명학은 역사에만 길이 남았다 . 그럼에도 퇴계와 남명이 30 대 후반에 이미 “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 ” 는 말이 퍼질 정도로 조선 지성사의 쌍 벽이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후일 이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 고 극찬했고 단재 신채호는 “ 그릇돼 가는 현실정치에서 혁명의 기수는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이다 .” 라고 일갈할 정도로 남명의 가르침을 극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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